꺼삐딴 리
"1962년"이라는 년도의 상징적 의미: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이름이 알려지던 시절.
박정희에 대한 풍자와 비판. (이인국 박사는 이명학 의사 + 박정희 전 대통령 을 섞어놓은 인물이다. 이를 알 수 있는 부분은, 일본령 조선 시절 천황으로부터 금장시계를 받았다는 점과, 해방정국 시기, 남로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전적과, 이후 대한민국 국군의 창립 멤버로써는 미국과 우호적인 모습, 특히 1961년 5.16 군사혁명 이후에 자신의 과거 논란을 뒤엎는 "국시 반공선언"을 하였기 때문임.
극도로 "세상"이 변하고 혼란하던 해방정국 시기, 한 개인이자 약소국(피지배 식민지국가)의 엘리트(지식인)계층의 모습을 문학이라는 예술로 함축하여 표현학 작품.
(배경은 1961-1962년 대한민국, 개발 도상국이며, 미국식 근대 건물들 (1950년대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시기, TV 휴대폰, 컴퓨터 절대 등장해서는 안됨, 당시 사진들을 기반으로 한 레트로 시대임)
꺼삐딴 리 전문:
수술실에서 나온 이인국(李仁國) 박사는 응접실 소파에 파묻히듯이 깊숙이 기대어 앉았다.
그는 백금 무테안경을 벗어 들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등골에 축축이 밴 땀이 잦아 들어감에 따라 피로가 스며 왔다. 두 시간 이십 분의 집도(수술칼을 잡음). 위장 속의 균종(菌腫)(혹과 비슷한 종기) 적출. 환자는 아직 혼수상태에서 깨지 못하고 있다. 수술을 끝낸 찰나 스쳐 가는 육감 그것은 성공 여부의 적중률을 암시하는 계시 같은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웬일인지 뒷맛이 꺼림칙하다.
그는 항생질 의약품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던 일제 시대부터 개복(배를 가름) 수술에 최단 시간의 기록을 세웠던 것을 회상해 본다. 맹장염이나 포경 수술, 그 정도의 것은 약과다. 젊은 의사들에게 맡겨 버리면 그만이다. 대수술의 경우에는 그렇게 방임할 수만은 없다. 환자 측에서도 대개 원장의 직접 집도를 조건부로 입원시킨다. 그는 그것을 자랑으로 삼아 왔고 스스로 집도하는 쾌감을 느꼈었다. 그의 병원 부근은 거의 한 집 건너 병원이랄 수 있을 정도로 밀집한 지대다. 이름 없는 신설 병원 같은 것은 숫제 비 장날 시골 전방처럼 한산한 속에 찾아오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이인국 박사는 일류 대학 병원에까지 손을 쓰지 못하여 밀려오는 응급환자들 틈에 끼여 환자의 감별에는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 그것은 마치 여관 보이(Boy)가 현관으로 들어서는 손님의 옷차림을 훑어보고 그 등급에 맞는 방을 순간적으로 결정하거나 즉석에서 서슴지 않고 거절하는 경우와 흡사한 것이라고나 할까.
이인국 박사의 병원은 두 가지의 전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병원 안이 먼지 하나도 없이 정결하다는 것과, 치료비가 여느 병원의 갑절이나 비싸다는 점이다. 그는 새로운 환자의 초진(初診)(처음하는 진찰)에서는 병에 앞서 우선 그 부담 능력을 감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신통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경우에는 무슨 핑계를 대든가, 그것도 자기가 직접 나서는 것이 아니라 간호원더러 따돌리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중환자가 아닌 한 대부분의 경우, 예진(豫診)(간단한 진찰)은 젊은 의사들이 했다. 원장은 다만 기록된 진찰 카드에 따라 환자의 증세와 아울러 경제 제도를 판정하는 최종 진단을 내리면 된다. 상대가 지기(知己)나 거물급이 아닌 한 외상이라는 명목은 붙을 수가 없었다. 설령, 있다 해도 이 양면 진단은 한 푼의 미수(未收)(돈을 못받음)나 결손(돈이 모자람)도 없게 한, 그의 인생을 통한 의술 생활의 신조요 비결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고객은, 왜정 시대는 주로 일본인이었고, 현재는 권력층이 아니면 재벌의 셈속에 드는 축이어야만 했다.
그의 일과는 아침에 진찰실에 나오자 손가락 끝으로 창틀이나 탁자 위를 훑어 무테 안경 속 움푹한 눈으로 응시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이때 손가락 끝에 먼지만 묻으면 불호령이 터지고, 간호원은 하루 종일 원장의 신경질에 부대껴야만 한다. 아무튼 그의 단골 고객들은 그의 정결한 결벽성에 감탄과 경의를 표해 마지않는다.
1.4 후퇴시 청진기가 든 손가방 하나를 들고 월남한 이인국 박사다. 그는 수복(땅을 되찾음)되자 재빨리 셋방 하나를 얻어 병원을 차렸다. 그러나 이제는 평당 50만 환을 호가하는 도심지에 타일을 바른 2층 양옥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 전문인 외과 외에 내과, 소아과, 산부인과 등 개인 병원을 집결시켰다. 운영은 각자의 호주머니 셈속이었지만, 종합 병원의 원장 자리는 의젓이 자기가 차지하고 있다. 이인국 박사는 양복 조끼 호주머니에서 십팔금 회중 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보았다.
“ 2시 40분! ”
미국 대사관 브라운 씨와의 약속 시간은 이십 분밖에 남지 않았다. 이 시계에도 몇 가닥의 유서 깊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이인국 박사는 시계를 볼 때마다 참말 '기적'임에 틀림없었던 사태를 연상하게 된다. 왕진 가방과 38선을 넘어온 피난 유물의 하나인 시계, 가방은 미군 의사에게서 얻은 새것으로 갈아 매어 흔적도 없게 된 지금, 시계는 목숨을 걸고 삶의 도피행을 같이 한 유일품이요, 어찌 보면 인생의 반려(伴侶)이기도 한 것이다. 밤에 잘 떼에도 그는 시계를 머리맡에 풀어놓거나 호주머니에 넣은 채로 버려두지 않는다. 반드시 풀어서 등기 서류, 저금 통장 등이 들어 있는 비상용 캐비닛 속에 넣고야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또 그럴 만한 연유가 있었다. 이 시계는 제국 대학을 졸업할 때 받은 영예로운 수상품이다. 뒤쪽에는 자기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후 삼십여 년,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이 변하여 갔지만 시계만은 옛모습 그대로다. 주변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은 얼마나 변한 것인가. 이십대 홍안(혈색이 좋은 얼굴)을 자랑하던 젊음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머리카락도 반백이 넘었고 이마의 주름은 깊어만 간다. 일제 시대, 소련국 점령하의 감옥 생활, 6.25 사변, 삼팔선, 미군 부대, 그 동안 몇 차례의 아슬아슬한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것인가. '월삼 17석' 우여곡절 많은 세월 속에서 아직도 제 시간을 유지하는 것만도 신기하다. 시간을 보고는 습성처럼 째각째각 소리에 귀기울이는 때의 그의 가느다란 눈매에는 흘러간 인생의 축도(원본보다 작은 그림)가 서리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도 각모(角帽)(사각모자)와 쓰메에리 학생복을 벗어버리고 신사복으로 갈아입던 그날의 감회를 더욱 새롭게 해주는 충동을 금할 길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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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국 박사는 수술 직전에 서랍에 집어넣었던 편지에 생각이 미쳤다. 미국에 가 있는 딸 나미. 본래의 이름은 일본식의 나미코다. 해방 후 그것이 거슬린다기에 나미로 불렀고 새로 기류계에 올릴 때에는 코(子)를 완전히 떼어 버렸다. 나미창! 딸의 모습은 단란하던 지난날의 추억과 더불어 떠올랐다. 온 집안의 재롱둥이였던 나미, 그도 이젠 성숙했다. 그마저 자기 옆에서 떠난 지금, 새로운 정에서 산다고는 하지만 이인국 박사는 가끔 물밀어 오는 허전한 감을 금할 길이 없었다. 아내는 거제도 수용소에 있을 때 죽었고, 아들의 생사는 지금껏 알 길이 없다. 서울에서 다시 만나 후처로 들어온 혜숙(蕙淑), 이십 년의 연령차에서 오는 세대의 거리감을 그는 억지로 부인해 본다. 그러나 혜숙의 피둥피둥한 탄력에 윤기가 더해가는 살결에 비해 자기의 주름 잡힌 까칠한 피부는 육체적 위축함마저 느끼게 하는 때가 없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서 난 돌 지난 어린것, 앞날이 아득한 이 핏덩이만이 지금의 이인국 박사의 곁을 지켜주는 유일한 피붙이다. 이인국 박사는 기대와 호기에 가득 찬 심정으로 항공 우편의 피봉을 뜯었다. 전번 편지에서 가타부타 단안(급하게 결정함)은 내리지 않고 잘 생각해서 결정하라고 한 그 후의 경과다.
'결국은 그렇게 되고야 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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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편지를 탁자 위에 밀어 놓았다. 어쩌면 이러한 결말은 딸의 출국 이전에서부터 이미 싹튼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서 영문과를 택한 딸, 개인 지도를 하여 준 외인 교수, 스칼라십(장학금)을 얻어 준 것도 그고, 유학 절차의 재정 보증인을 알선해 준 것도 그가 아닌가. 우연한 일은 아니다. 그러한 시류(시대흐름)에 따라 미국 유학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한 것은 오히려 아버지 자기가 아닌가. 동양학을 연구하고 있는 외인 교수. 이왕이면 한국 여성과 결혼했으면 좋겠다던 솔직한 고백에, 자기의 학문`을 위한 탁월한 견해라고 무심코 찬의(좋다고 수긍함)를 표한 것도 자기가 아니던가. 그것도 지금 생각하면 하나의 암시였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이인국 박사는 상아로 된 오존 파이프를 앞니에 힘을 주어 지그시 깨물며 눈을 감았다. 꼭 풀 쑤어 개 좋은 일을 한 것만 같은 분하고도 허황된 심정이다.
'더러운 년 같으니, 기어코…….'
그는 큰기침을 내뱉었다. 그의 생각은 왜정 시대 내선 일체(內鮮一體)의 혼인론이 떠돌던 이야기에 꼬리를 물었다. 그때는 그것을 비방하거나 굴욕처럼 느끼지는 않아다.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해석했고 어찌 보면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경우는……. 그는 딸의 편지 구절을 곱씹었다. '애정에 국경이 있어요?' 이것은 벌써 진부하다. 아비도 학창 시절에 그런 풍조는 다 마스터했다. 건방지게, 이게 새삼스레 아비에게 설교조로……좀 더 솔직하지 못하고……. 그러니 외딸인 제가 그런 국제결혼의 시금석이 되겠단 말인가. '아무튼 아버지께서 쉬 한 번 오신다니 최종 결정은 아버지의 의향에 따라 결정할 예정입니다만…….' 그래 아버지가 안 가면 그대로 정하겠단 말인가. 이인국 박사는 일대 잡종(一大雜種)의 유전 법칙이 떠오르지 머리를 내저었다. '흰둥이 손자' 생각만 해도 징그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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