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と日本語と俺の話

 2024년 2월 경 블로그에 글을 작성하였으나 컴퓨터 문제로 전부 날아가 버려서, 더 내용을 더해서 쓴다. 오늘은 2024년 6월 26일 시험기간이다. 시간이 별로 없기에 한국어로 쓴다. 꼭 추후 일본어로 번역해둬라. 

2024年2月頃ブログに書いたがパソコン問題で全て失ってしまって、もっと内容を加えて書く。今日は2024年6月26日試験期間。時間のないので韓国語で書く。ぜひ日本語でも翻訳して置けよ。

내가 일본이라는 존재를 인식하게 된 것은 유치원 전 시기였을 것이다. 계기는 바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외갓집 베란다에서 가지고 놀던 야마노테선 지하철 단칸장난감이다. 우리나라 2호선 안내방송으로 수출이 되어서 우리나라에서 2호선으로 판매가 되었지만, 눈이 예리했던 나는 단칼에 우리나라 지하철이 아님을 인지하고, 일본의 지하철임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일본이란 존재는 그때는 지금처럼 알지는 못했다. 오히려 아버지께 들은 역사교육관과 민족사관이 일본에 처음 접하게 된 계기였다. 아버지께서는 일본에 대해서 우리나라를 과거 35년간 식민지비하였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고, 우리나라가 약하고 너(우리 한국인 모두가) 열심히 살지 않고 나라가 힘도 의지도 없으면 다시 일본의 식민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여 주셨다. 반복적으로 말이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집착이 심했던 나는 일본에 대한 인식은 했어도 관심은 전혀 없었고, 정말 우리를 괴롭혔던 사실만을 인지했고, 별다른 호감도 혐오감도 없이 당장 내 앞의 지하철과 기차들, 그리고 맛있는 음식과 나를 사랑해주는 부모님과 가족들만이 내 세상의 전부였다. 그렇게 살아오면서 나는 어느덧 만 5살에 영국으로 가게 되었고 영국에서도 기차를 타며 표를 모으는 원정은 계속되었다. 


俺が日本という存在を認識した事に成ったのは幼稚園の前の時期で有るはずだ。きっかけは、まだも生動感と共に記憶する外家(母の親家)ベランダで持って遊んだ山手線の単間列車の玩具(おもちゃ)で有る。我が国(大韓民国)の2号線案内放送で

영국에서 나의 런던거주시절 절친이었던 인도인 프리시아네의 이사했던 윔블던의 집에 갔을 때 겪었던 일이 당시 무의식적인 세뇌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예가 되었다. 프리시아네는 2층 맨션 형식의 주택에 거주하였고, 프리시아네는 1층, 그리고 이웃은 2층에 살았다. 아직도 맨션의 야외계단에서 서있었던 프리시아네 이웃인 일본인 여자아이와의 대화가 생생하게 남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여자애를 마주쳤을 때, 그리고 프리시아가 '일본인' 이라는 단어로 그 여자애를 수식했을 때에, 몸이 멈추더니, 마치 적을 만난것과 같은 본능적인 떨림과 긴장, 그리고 아버지께서 수시로 나에게 지속적으로 일본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셨던 사실들이 떠올랐다. 이때는 내가 어리고 너무 순수해서 그렇게 말을 믿었던 것 같지만, 지금 봐서는 그때 나는 너무 순수했었다. 사실 여자애와의 대화 내용을 회상해보자면, 내가 직접 말한것이 아니라 프리시아가 면전에서 대신 전해주는 대화였다. 그저 여자아이는 본인은 한국어를 배우고 있고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반가워하였다. 나는 한국어로 말을 하자 그 여자아이는 그건 한국어가 아니라고 했고, 그 말을 프리시아가 전해주었다. 나는 사실 기분이 상하기는 하였지만, 우리 부모님은 나중에 아직 어려서 그 여자아이는 국경에 대한 개념이 없어 같은 동양인은 같은 나라 말을 쓰는 것으로 알았을 수도 있다고 하여 주셨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일을 잊어버리려 하였으나, 어째서인지 그 장면과 기억이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것은 왜 그런 것일까? 그렇지만 모순적으로 일본인 부부가 운영하는 런던의 맛있었던 일식집, 나는 아직 어리고 배탈이 날 수 있었다고 영국 거주 당시 같이 지냈던 벨라 이모, 베리 이모, 삼촌 등 같이 일식집에서 식사하였던 기억이 난다. 거기서는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깨달았어도 반감은 없었다.


그러고 어느덧 나는 영국에서 만 7살이 되어 한국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당시 내가 보았던 한국은 주류 자가용 및 2000년대의 물결이 나름 남아있던 시기였다. 그 시기에 나는 한국에서 살면서 솔직하게는 점점 반일주의자가 되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지금의 박학다식한(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솔직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역사, 사회, 정치, 인문 분야에서는 남들이 내가 박학다식하다고 여러해의 여러 집단, 조식에서 인정 받고 말을 듣기는 하였다) 모습이 되기에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아이스크림 홈런이라는 교육 태블릿 프로그램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부터 나의 담당 화상 과외 선생님께서 


나는 이때 아버지와 첫 일본여행 당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일본에 대한 충격과 열등감에 심하게 일본에 대한 욕을 하였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금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일본인도 아니 이세상 누구든, 똑같은 인간이다. 동물도 마찬가지, 인간도 동물이기 때문이다. 자기 무리 내 서열, 정형화 하자면 자기가 소속된 집단의 서열 위의 상사나 선배의 억압에 힘들어하기도 하고, 자기도 아랫사람한테는 좀 군기도 잡고 어질게 대할 때도 있고, 솔직히 노동의 기쁨도 알테고, 일하기 싫고 놀고 싶고 현대인이라면 잠좀 더 자고 싶을 수도 있고. 이걸 아차! 하고 가장 머리에 띵 맞게 느낀 순간이라면 일본어를 최대치로 잘하게 된 2023년 2월달 일본방문 당시 일본사람들의 공공장소 대화와 가족 모습을 보았을 때, 한국사람들이랑 똑같은 말을 그냥 일본어로 하는 것을 보고 느꼈다. 문화가 달라도 세상 사람들 모두 다 똑같다. 인종차별하는 사람들 이해가 안된다. 


2024년 9월 30일 이어서 작성함


나는 자라면서 일본에 대한 반감은 역사교육 및 사회교육이외에는 거의 없었다. 내가 나고 자란 내 고향 동네인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은 일제시대 일본사람들이 영국과 미국 그리고 서양의 어려 건축양식을 일본식 건축양식과 혼합하여 설계한 모던하우스 단지였기 때문이다. 대일본제국 내 조선총독부 산하 경성부 동사헌정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에는 진로나 꿈은 현재처럼 건축학과를 지망하지 않았다. 그때에도 이과를 지망하였으며 공학도가 되어 철도 및 자동차를 설계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었다. 사실 관심이 움직이는 물체에서 고정된 공간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내가 지망하는 것은 디자인 분야였다. 하지만 중학교 1학년 당시 건축학을 전공하면 무엇이든지 효율적으로 디자인을 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운다고 김준호 건축사님께서 알려주셔서 건축가가 되고 싶었다. 부분집합의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겠다. 어릴 적 반일감정이 정치적으로는 있으나 문화적으로는 일본에 친숙한 대한민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왔기에, 일본 만화를 자주 보게 되었다. 사실 건축학을 굳이 하지 않고 잘 몰라도 예리한 관찰력과 사고를 할 수 있다면, 내가 느끼고 찾은 바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짱구는 못말려(일본명: 크레용 신짱), 및 도라에몽이라는 만화를 자연스레 방영되는 텔레비젼 속에서 보며 자라왔다. 이때에 느낀 점이 이상하게도 우리 동네와 너무 닮아있는 일본의 동네들이 그렇게 호기심이 갈 수가 없었다. 나는 그래서 조사는 고사하고 가설을 세웠는데,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동네를 설계하여 우리 동네가  일본식 동네로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2022년 대경성부대관 및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 추합한 지식들과 답사한 자료를 토대로 2023-2024년 IB Extended Essay 를 작성하며 사실임을 탐구할 수 있었으며 일본 건축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통해 학부는 영국에서 공부를 지망하되, 대학원은 일본으로 진학할까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이로써 태어난 배경이

2017년 4월 일본 도쿄와 오사카를 방문한 이후 어머니와 둘이 종로의 일본어 학원에 한달간 등록하여 주말마다 나갔던 기억이 있다. 이때에 진도는 너무 빠르고 아직 초등학생 수준이라 언어감각이 없던 나로써는 울며 눈물 콧물을 수업시간에 쏟고 시험도 낙제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일본어를 잠시 중단하였다. 

나에게 기적적인 부활을 경험하였던 것은 어머니께서 결국 과외 수업을 붙여주셨던 것이 지금 나의 일본어 실력을 쌓아 올린 계기이다. 아직도 그 날을 기억 한다. 초등학교 5학년 11월달 수학 경시대회에서 시험을 매우 잘 보고 (그 날 본 시험의 결과는 90점이었음) 이태원으로 어머니가 다니던 회사 근처로 일본어 수업을 들으러 갔다. 나를 가르쳐 주시게 된 선생님은 매우 아름다우시고 착하신 김현진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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